자발적 관심사/보고 듣고 읽고

세상의 끝까지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절절한 마음이란 어떤 걸까?

2sim 2020. 7. 12.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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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140416)

 둥근 달무리나 똥 마려운 얼굴, 혹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비록 형편없는 기억력 탓에 중간중간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러다가 6월을 다 잡아먹을 듯 기세가 등등하던 장마도 완전히 끝나고 뜨겁고 뜨겁고 뜨겁기만 한 여름 햇살이 작열할 무렵, 책을 빌리러 갔다가 나는 게시판에「세계의 끝 여자친구」란 시가 붙어 있는 걸 보게 됐다. 그 시에 따르면, 시인이 걸어가는 길의 끝에는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거기가 바로 세계의 끝이며 그때 우리는 "불과 눈물이 서로 스미듯이, 혹은 달과 무지개가 그러하듯이" 나란히 메타세쿼이아 거친 둥치에 등을 기대고 앉게 될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사랑은 저처럼 뒤늦게/ 닿기만 하면, 닿기만 하면/ 흔적도 없이, 자욱도 없이//삼월의 눈처럼"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한동안 우리는 날씨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차라리 쏟아져 내리면 그나마 마음이라도 흡족할 것을, 내리는 둥 마는 둥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장마에 대해서, 균질하게 하늘을 가득 메운 무미건조한 회색에 대해서, 뜨겁고 뜨겁고 뜨겁기만 한 여름 햇살을 향한 본능적인 그리움에 대해서. 나는 장마가 계속 이어지는 탓에 달리기를 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녀는 내가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다가 어느 결엔가 그녀가 내게 말했다. "맞아, 좋았어. 우리 참 좋았어. 그렇긴 하지만 우린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 그 말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고, 또 슬프게 만들었다. 우선 '맞아'라는 말 때문에, 그 다음에는 '그렇긴 하지만'이라는 접속사 때문에. 맞아. 그렇긴 하지만. 맞아. 그렇긴 하지만.


 '맞아, 어쩌면 이 장마는 영원히 계속될지도 몰라. 그렇긴 하지만, 나는 한번 달려보겠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장마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나는 노란색 반바지에 반소매 셔츠를 입고 가랑비가 흩뿌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신도시 단독주택 지구는 마침내 장마의 마지막 며칠을 보내고 있었고, 키가 고만고만한 다세대주택과 빌라들 사이, 스물네 시간 자동차가 주차돼 있는 좁은 골목길로는 빗물들이 하수구를 찾아서 하교하는 초등학생들처럼 몰려다니고 있었다. 한때 닥나무밭이 있던 자리였다는 안내판이 세워진 작은 고원의 벚나무와 느티나무 들로는 벌써 며칠째 새들이 날아오지 않았고, 한쪽 구석에 외롭게 떨어져 서 있던 그네와 미끄럼틀은 한 계절의 분량만큼 녹슬어갔다. 그날은 아침 뉴스에서 노란색 비옷을 입은 캐스터가 손끝으로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기압골을 가리키며 내일부터 무더위가 시작되리라고 예보하던 금요일이었고, 그리고 저녁이었고, 나는 호수를 향해 달려갔다. 옷 속으로 빗물이 스며드는 꼭 그만큼, 그네와 미끄럼틀로 녹이 스는 꼭 그만큼, 기압골이 이제 한반도에서 조금씩 물러나는 꼭 그만큼, 내 스물다섯의 나이도 흘러가고 있었다. 스물다섯의 고민이란 그 고민마저도 꼭 그만큼이라는 것. 원하는 만큼이 아니라 꼭 그만큼이라는 것.


 "병상에 찾아갔더니 이 시를 보여주더군요. 읽고 나서 '난 이 시가 참 좋단다'라고 말했더니, '그건 희선씨한테 주려고 쓴 시가 아니니까 김칫국 마시지 마세요', 그렇게 대답하더군요. 난 연애 이야기라면 언제나 귀가 솔깃한 사람이라서 자꾸 캐물었죠. '이 시에 나오는 여자친구가 누구니?' 그랬더니, '착한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더라구요. '아휴, 당연히 착하겠지. 얘기해봐. 어떻게 만났는데? 무척 사랑했던 모양이지?' 내가 물었죠. '맞아요그렇게요세상의 끝까지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요.' 그렇게 말하곤 키득키득 웃던군요. 세상에, 웃음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네. 그렇게 웃고 나서는 '다른 남자의 아내인데, 그날 밤에 같이 도망가자고 말하지 않은 게 정말 잘한 일이죠,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까'라고 말하더군요. 그 사람, 그렇게 죽었어요. 나중에 시인의 장례식장에서도 혹시 여기에 왔을까, 왔다면 누구일까, 혼자 궁금해서 슬퍼하는 젊은 여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봤어요. 시인이 사랑했던 사람이 누굴까? 그런데 이 글을 보니, 정말 웃긴 일이네요. 차마 같이 도망가자는 말은 못 하고, 둘이서 가장 멀리까지 가 본 게 그 메타세쿼이아까지라던데, 그럼 고작 저기 호수 건너편까지 가본 게 다잖아. 그래놓고서는 어떻게 세계의 끝이라고 말할까……"

 "왜 이 시를 선택했나요?"

 "아휴, 지난번에 다 얘기했는데, 여기서 또 해야 하나?"

 "그러게요. 제가 신입회원인 관계로……"

 희선씨가 기분 좋게 자글자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요즘 들어서, 살아오는 동안 안 하고 넘어간 일들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청년은 아직 이게 무슨 기분일지 모를 거야. 한 일들은, 그게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마음에 남는 게 하나도 없는데, 안한 일들은 해봤자였다고 생각하는데도 잊히질 않아요. 왜, 하지도 않은 일이 잊히지 않는다니까 우스워요? 그러게. 그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그 여자친구를 찾아가서 시인이 당신을 무척 사랑했노라고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이 시를 도서관 게시판에 붙여놓을 생각을 한 거지. 그러면 이 시를 알아보는 누군가가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아까 청년이 들어올 때도 그랬고, 이 시 때문에 모임에 온 것이라고 말했을 때도 그랬는데, 참 놀랍고 기쁘기도 했지만, 그래서 한편으로는 실망감도 들었어요."


 잠시 아무런 말 없이 앉아 있다가 희선씨가 먼저 일어났다. 딴생각을 하다가 헐레벌떡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선씨는 내가 회의실을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그때 나는 그녀를, 우리가 함께 보낸 나날들을, 영원히 나를 후회하게 만들고 나를 괴롭힐 게 분명한 그 일들을, 우리가 함께 꿈꿨으나 결국 가지지 못했던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내게 새로운 여자를 만나면 모든 일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함께 꿈꿨던 미래를 다시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맞다. 그런 건 이제 흔적도 없이, 자국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혹시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 시인은 거기에다가 뭘 물어봤을까요? 책에 '거기에 묻다'라고 써놓았잖아요."

 희선씨는 낙제생을 바라보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건 뭘 물어본 게 아니지 않겠어요? 뭘 묻었다는 뜻이지."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생에 단 한 번은 35미터에 달하는 신의 나무를 마주한 나무학자 왕잔의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룡과 함께 살았다는, 화석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 숨쉬는 그 나무.
 그날 밤, 희선씨와 내가 보게 된 것은 불로 밀봉한 두꺼운 비닐속에 들어 있는 편지였다. 그 편지는 호수 옆, 굵은 메타세쿼이아둥치 근처에 묻혀 있었다. 시인이 책의 여백에 휘갈겨쓴 글귀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그렇다면 그 메타세쿼이아 밑에 시인이 뭔가를 묻어놓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해 그길로 호수 건너편까지 가서 땅을 파본 것이었는데, 그간 몇 번의 장마가 지나갔던 탓이었는지 뜻밖에도 얼마 땅을 파지도 않았는데 그 편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톱니바퀴는 겉봉에 적힌 그 이름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겉봉에 적힌 주소지는 메타세쿼이아가 있는 호수에서 걸어서 삼십 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주의 금요일은 뜨겁고 뜨겁고 뜨겁기만 한 햇살이 거리를 하얗게 표백시키고 있었다. 커피전문점으로 나를 찾아온 희선씨와 함께 그 햇살이 조금 누그러지기를 기다리며 커피를 마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무례한 질문처럼 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희선씨에게 무슨 일로 병원에 들어가느냐고 물었다. 희선씨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새파란 청년에게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가슴 한쪽을 잘라내야만 하거든."
"아, 죄송합니다."
"청년이 나한테 죄송할 일이 뭐가 있어? 내가 창피한 거지."
내가 몹시 당황하자, 희선씨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렇기 웃어줘서 고마웠다. 조금 있다가 여전히 입가에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하지만 주름이 많은 두 눈만은 씁쓸한 표정으로, 희선씨가 말했다.
"사실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요. 왼쪽 가슴만 잘라내면 되는 일인지, 아니면 더 많은 것들을 잘라내야만 되는 일인지. 의사도 모르고, 가족도 몰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럴 때는 무척 외로워. 나 자신한테도 외롭다니까. 앞으로 한 십 년쯤, 아니, 십년은 너무 과한 욕심이고, 당장 내년 이맘때쯤에는 어떨까? 햇살은 여전히 이렇게 뜨거울까? 내년에도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길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들 저렇게들 앉아 있을까? 내년 여름에는 또 어떤 노래가 유행할까? 다음에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까? 이 사람은……"
희선씨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편지를 가리켰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편지를 메타세쿼이아 밑에다 묻어놓았을까? 학생 때부터도 속이 하도 깊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더니만……요즘 많이 생각나네요, 이 사람이."


 나는 생각해봤다. 맞아요. 그랬어요. 십 년은 고사하고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다음 여름에도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다음에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봤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됬다. 다시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그 나무는 한 연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무일지도 모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희선씨에게 내가 말했다.

 "맞아요. 그러니까……,그렇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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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왜 페이스북 페이지에 인용될 만큼 그렇게 귀여운 이야기인가, 를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제대로 읽지 않았음에 틀림없어. (와 완전 번역체 말투) 받아 적으면서 오히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이야기의 제목이 책 전체의 제목이 된 이유가 있었구나. 맞아요, 하지만, 맞아요, 그랬어요, 맞아요, 그렇게요, 맞아요, 그렇긴 하지만.

 

 세상의 끝까지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절절한 마음이란 어떤 거였을까. 차마 도망가자는 말도 하지 못하면서 그 사람과 가본 그 곳이 세계의 끝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 세계의 끝이라는 건 어떤 곳인걸까, 감히 나는 상상도 못할 곳인 것 같다. 

 

 세계의 끝, 이 단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가사가 생각났다. I have died everyday waiting for you. I have loved you for a thousand years. I love you for a thousand more. 당신을 기다리며 나는 매일 죽어왔다는 고백. 나는 이미 너를 천년간 사랑해왔다는 고백. 그리고 천년을 더 사랑할거라는 고백. 

 

 

세계의 끝 여자친구 (140416~1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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